about 장춘종묘(주)/멜론-캔탈로프

[스크랩] [역사를 맛보다]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와 멜론

황운순박사 2016. 9. 27. 22:04

[역사를 맛보다]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와 멜론

문학 巨匠은 책 500권을 이 과일과 맞바꿨다

"어느 토양과도 잘 어울리는 멜론은 수백 종류에 이르네 교황들도 흠뻑 빠졌지"

"多産性에다 적응력 강해 흑인·유럽인 피 물려받은 나를 상징하는 과일이지"


스케일은 웅장했고, 상상력은 거침없었으며, 대사는 생생했다.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유명한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p�]re, 1802~ 1870·사진)를 19세기 프랑스의 대표 작가로 대접하지 않는 것은 불공평하다.

그러나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는 논쟁적이다. '소설이 너무 신파적이다', '공동창작으로 돈을 번 문학계의 흑사병이다'란 비난이 있는가 하면, 세계 최고의 소설가이자 여행작가이자 요리연구가라는 수식도 있다. 그를 미워하긴 쉽지 않다.

―이런 대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는 물라토(mulatto, 흑백 혼혈)였고 내 조부는 깜둥이였소. 증조부는 원숭이였지. 알겠소, 선생? 우리 가족은 당신네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하였소.'(소설 조르주) 선생 심경을 대변했다던데, 먼저 간략한 설명 부탁합니다.

"얼마 전 지진이 났던 곳, 아이티(Haiti). 그곳에서 프랑스 포병장교였던 내 할아버지, 드라페테리 후작은 현지인 마리 세셋 뒤마와 결혼했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어머니 성을 써야 했던 그들의 아들, 즉 내 아버지는 나폴레옹 휘하에서 큰 무공을 세웠지. 그러나 내가 네살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 1/4 흑인혼혈(Quadroon)인 나는 무진장한 독서, 무한한 상상력 덕에 겨우 작가로 성공했네."

―1829년 희곡 '앙리 3세와 그의 궁정'이 성공한 후, 몇편의 희곡을 쓰던 당신은 곧 신문연재소설이라는 새 장르에 도전합니다.

"1830년대 중반 프랑스에선 출판에 대한 검열이 사라지고, 대신 곳곳에 학교가 생겼어. 난 사람들이 신문을, 읽을거리를 많이 찾게 될 것을 예감했던 거야. 1838년 '프레스(La Presse)'지와 얘기해서 바로 소설을 시작했지."

―선생은 많은 보조작가를 두고 있었는데요, 바로 그런 이유로 '황금 소의 재단에 육신과 영혼을 바친 작가', '모두 뒤마를 읽었지만 아무도, 심지어 그조차도 뒤마를 읽지 못했다'는 모욕적인 표현도 있었습니다.

―거참, 답답한 사람들.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내 조수들의 존재를 부인한 적이 있었던가? 오귀스트 마케(Maquet)얘기를 잠깐 해볼까. 역사학 강사였던 그를 문학으로 이끌어 큰돈을 벌게 해 준 게 나요.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 '20년후' '여왕 마고' 등을 작업할 때, 그가 큰 플롯을 잡으면 내가 거기에 입체적인 캐릭터와 대사를 집어넣었지. 그뿐 아니라 10여명의 작가들 업적은 내가 다 기억하네. 난 '아이디어를 깨우는 사람'이었어. 게다가 공동창작은 우리 시대엔 이상할 게 없었다고. 조르주 상드의 '베아트리스',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 역시 이런 방식으로 나왔으니까. 라파엘로, 다비드, 엥그르 같은 화가들도 제자의 밑그림에 마지막 터치를 가했는데, 그들도 사기꾼인가? 잊지 마시오, 대중들은 내가 공공장소에 들어설 때마다 나 뒤마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는 사실을."

―당신은 말년에 요리책 '요리 대사전'을 씁니다. 무려 60만 단어에 달하는 아주 방대한 분량으로요.

"프랑스 혁명은 요리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오. 단두대를 피한 귀족의 요리사들은 레스토랑으로 몰려와 요리를 발전시켰지. 쓰지 않을 도리가 있나."

―그 책은 당신 사후인 1873년에야 발간됩니다. 하지만 책이 균형을 잃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코코아는 6장, 우유는 반장 쓰는 식이었으니까요.

"매주 수요일 밤 11시부터 나는 당대의 예술가와 작가를 불러다 무려 15가지 코스 만찬을 베풀었소. 400명이 모이는 파티도 자주 열었지. 요리사 줄리엥이 준비를 했지만, 샐러드만은 반드시 내가 만들었다고. 아프리카, 아제르바이잔 등 이국의 요리를 프랑스에 알려준 것도 나였고. 뭐가 부족한가?"

―당신은 베르사유 궁 근처에 1843년 무려 150만프랑을 들여 '몬테크리스토 성'을 지을 정도로 호사스러운 생활도 했습니다.

"멋진 성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팔이 빠지게 써댔지.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 게다가 아내가 얼토당토않은 위자료를 요구하는 바람에 말년엔 고생깨나 했지."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쓴 책 500권을 프랑스 남동부 도시, 카바이용(Cavaillon) 도서관에 기증하는 대가로 일년에 12개의 멜론을 요구합니다. 돈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던 선생치고는 정말 소박한 협상이었습니다.

"그건 자네가 카바이용 멜론을 못 먹어봐서 하는 소리야. 1870년까지 7년간 받아먹은 멜론은 정말 그 향기와 육질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지. 멜론은 덥고 마른 땅에서 자라지만 과육의 90%가 수분이야. 익지 않으면 야채로 쓰고, 익으면 과일로 먹지. 이집트, 중국에서 기원했지만 특히 아비뇽 유수(1309~1377) 시절, 교황들이 멜론에 흠뻑 빠졌지. 이 과일은 마르코 폴로가 머물렀던 내 할머니의 고향 아이티를 통해 북미에 전파됐네. 그 씨는 6년 후에 심어도 싹이 나고, 먹다가 뱉은 것도 후에 멜론으로 자라나는 엄청난 다산성이지. 게다가 어느 토양과도 어울려 그곳에 뿌리를 잘 내려, 멜론의 종류는 수십, 수백종에 달하네."

―왠지 혼혈인 선생과 비슷하다는?

"엄격한 순혈 비중이 줄고, 유색인종이 늘어나는 과정과 비슷하지 않나? 러시아 작가 알렉산더 푸시킨과 영국 시인 로버트 다우닝도 위대한 흑인 혼혈이었지. 난 흑인에게서 곱슬머리와 두꺼운 입술, 열정적인 언변과 제스처를, 유럽인으로부터 다중적인 미소와 딱 벌어진 어깨를 물려받았지. 나를 상징하는 과일로는 다산성에다 적응력 강한 멜론이 어울리는 것 같지 않은가."

―왜 그리 먹는 데 집착했습니까.

"동침을 할 순 있어도, 밥을 같이 먹긴 힘든 사람들이 있지. 그만큼 먹는다는 건 중요한 행위라네. 뭔 설명이 더 필요하겠나."

참고자료

Alexandre Dumas-A Great Life in Brief, Andre Maurois

Taste of Haiti, Mirta Yurnet-Thomas

The Story and Memory in African-American Culture, genevieve Fabre

Children of French Revolution:the French, Robert Gildea

[박은주 기자
출처 : 계속이 힘이다.
글쓴이 : nyscan 원글보기
메모 :